니체에게서 최초로 명료된 '신의 죽음'
'신의 죽음'은 니체의 후기 사상의 중심 개념들 가운데 하나다.
[차라투스트라]에서 가장 중심적으로 전개된 이 신의 죽음은 단지 하나의 개념으로만 그치지 않고 니체의 [인간적]과 더불어 시작된 비판과 해체를 위한 작업들의 결절점으로서 의미와 그로부터 더 나아가 개시되어야 하는 새로운 사상 단계에서의 결정적인 도약점으로서의 의미를 짊어지고 있다. 이 개념이 니체에게서 최초로 명료한 형식으로 등장하는 것은 [즐거운 학문]의 125번이다. "너희에게 그것을 말해 주겠노라!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들과 내가! 우리 모두가 신을 죽인 살해자다!" 광장에 돌연 ㅣ나타나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소리 높여 외치는 미치광이처럼 보이는 남자는 분명히 차라투스트라의 선구자다. 신의 실해,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 지금까지 없는 '위대한 행위'라고 남자는 말한다. 그리고 '우리 이후에 태어난 자는 모두 이 행위 때문에 지금까지의 어떤 역사보다도 더 높은 역사에 속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로부터 우리는 신의 죽음이 니체에게 있어 다름 아닌 인류의 역사에서 하나의 결정적인 전회를 이루는 개념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차라투스트라]의 주제가 된다.
우선 [차라투스트라]의 서문을 살펴보자. [학문]의 342번에서도 인용되어 있는 서문의 서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우선 자기 내부에서의 풍요와 차고 넘침을, 그리고 그 풍요와 차고 넘침을 인간들에게 나눠주기 위한 '몰락'에의 의지를 말한다. 이 풍요·차고 넘침이란 여기서 차라투스트라가 스스로 신과도 비교할 수 있는 어떤 절대적인 긍정성의 높이에까지 이르렀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그것은 뒤집어 말하자면 차라투스트라에게 있어서는 이미 신이 불필요한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점으로부터 분명 해지는 것은 차라투스트라에게서 신을 중심으로 하는 삶과 존재의 모습이 해체되었다는 것이다. 숲 속의 은자와 만나 그의 자족적인 생활 모습에 얼마간의 호의를 느끼면서도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도 은자가 신 쪽을 향해 있어 본래 눈을 향해야만 하는 인간 쪽을 향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차라투스트라는 대단히 유명한 저 대사를 마음속으로 말한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저 늙은 성자는 숲 속에 살고 있어서 신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나 보다" 다만 여기서 '신의 죽음'의 선고와 인간에게로 눈을 향하는 것이 맞짝을 이루어 있다고 해서 차라투스트라로 하여금 신의 죽음의 선고로 이끈 풍요와 차고 넘침이 곧바로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긍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신의 죽음의 의미, 좀 더 정확히 하자면 신의 죽음을 전회의 계기로 하여 나타나는, 신이라는 중심을 결여한 삶과 존재의 모습과 의미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경우 신의 죽음의 또 하나의 요소인 '몰락'에의 의지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신의 죽음'에 대한 하이데거의 파악방식
여기서 니체의 신의 죽음에 관해 독특한 해석을 보이고 있는 하이데거의 논문 [니체의 말 '신은 죽었다']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하이데거는 이 논문에서 [학문] 125번을 문제 삼는 가운데 신의 죽음을 둘러싼 니체의 사유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다. 그러함에 있어 하이데거가 묻고자 하는 것은 니체의 신의 죽음에서 나타나는 형이상학의 문제다. 하이데거는 니체의 신의 죽음이 유럽에서의 형이상학의 최종 단계, 즉 형이상학의 다른 길의 가능성이 이미 남아있지 않은, 형이상학의 어떤 본질적인 전도의 국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달리 표현하자면, 신의 죽음이 니힐리즘이라는 사태와 결부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니체 자신은 서구의 역사를 형이상학적으로, 더욱이 니힐리즘의 도래와 전개로서 해석한다. 니체의 형이상학을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은 그 운명을 진리라는 점과 관계시키면서 아는 것이 아직 거의 없는 현재의 인간의 존재방식 및 장소에 대한 성찰이 된다."
그러면 하이데거가 니체의 신의 죽음에서 보고자 하는 형이상학의 니힐리즘이란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바로 이미 우리가 니체의 사고 한가운데서 확인한 현상과 본질의 위계 관계의 전도다. 신의 죽음과 더불어 유럽 형이상학의 핵심을 형성애 온 이념·이상이 감성적 영역의 복위와 그것을 통한 양자의 구별의 소멸에 의해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의 신의 죽음의 사고는 형이상학의 해체의 사고, 다시 말하면 반형이상학의 사고라고 불러야만 하는 것일까? 실제로 하이데거도 니체의 위와 같은 사고 성격을 '반플라톤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이상학에 대한 니체의 반대 운동은 그것의 단순한 뒤집음으로써 형이상학 속으로 말려 들어가 출구를 잃고 있으며, 그 결과 형이상학은 스스로를 스스로의 본질로부터 차단해 버려 형이상학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본질을 결코 사유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니체에 대한 비판적인 시점은 니체의 형이상학의 니힐리즘이 니체의 가치 철학과 그것의 궁극적인 도달점으로서의 '힘에의 의지'와 결부되어 있다고 하이데거가 인식하고 있는 것에서 생겨난다. 확실히 니체는 '최고의 가치가 그 가치를 상실하는 것'으로서의 가치의 전환에서 형이상학의 전도의 핵심적 사태를 보고자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가치가 복수의 힘의 위계 관계에 의해 정립된다고 니체가 말하고, 동시에 이것을 근거로 하여 가치 정립이 '힘에의 의지'의 나타남으로 생각될 때, 가치의 전환은 가치 관계 그 자체의 소멸이 아니라 '힘에의 의지'를 실체(=본질)로 하는 새로운 가치 정립으로 연결되어 간다. 이것은 '힘에의 의지의 형이상학'의 탄생을 의미한다.
푸코의 '인간의 죽음'
마지막으로 니체의 신의 죽음과 푸코의 [말과 사물]에서의 '인간의 죽음'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니체의 신의 죽음 개념이 그 후의 사상의 역사에 준 영향이라고 말할 때, 맨 먼저 생각에 떠오르는 것이 푸코의 바로 이 '인간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신의 죽음 이상으로 니체의 사유가 고시하는 것, 그것은 그 학살자의 종언이다. 철학의 종언과 도래해야 할 문화의 약속은 대체로 유한성의 사유 및 앎에서의 인간의 출현과 전적으로 일체를 이루는 것일 뿐이다. 오늘날 철학이 여전히 종언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과 필시 철학 속에서 하지만 더 나아가 그 이상으로 철학 바깥에서 그에 대항하여, 즉 문학에서도 형식적 반성에서도 언어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은 대체로 인간이 소멸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푸코는 19세기 근대에서의 앎의 배치를 노동·생명·언어의 세 가지 요소로부터 파악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요소가 초래하는 유한성에 둘러싸이면서 인간이라는 개념이 세 가지 요소의 배치도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그리고 이 인간이라는 개념에는 주체의 선험성, 사고할 수 없는 것으로서의 사고, 기원의 반복이 있다. 이러한 인간을 둘러싼 앎의 배치도 속에서 푸코는 인간이라는 왕위로 응집해 간 19세기 근대라는 시대의 구조를, 만약 지금까지 니체에 준거하여 우리가 사용해 온 말로 하자면 초월성의 구조를 보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서 푸코의 인식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은 니체의 계보학의 입장일 것이다.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역사적인 한정성 속에서 산출된 유한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푸코의 인식은 분명히 모든 것을 해석의 원근법하에서 상대화하고자 하는 니체의 계보학의 영향 하에 태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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