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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학 공부

자유정신과 이성 비판

by 아이화 2023.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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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비이성 사이

변명도 말라! 용서도 말라!

그대 기쁘고, 마음이 자유로운 사람들이여 베풀어다오

이 비이성의 책에 

귀와 마음과 쉴 곳을!

믿어다오, 친구들이여!

저주가 되지 않도록

나의 비이성이 나에게

 

이 어릿광대의 책에서 배우라,

어떻게 이성이 '이성'에 이르는가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제1부에 덧붙여진 시 [친구들 사이에서]에서 니체는 도래해야 할 '자유정신'에게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 '이성에 이른다'라는 표현은 '이성을 되찾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마지막 행은 '이성은 지금까지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따라서 어떻게 해서 제정신을 되찾을 것인지를 배워야만 한다'라는 것일까? 하지만 이 성이 제정신을 되찾기 위해 왜 '어릿광대의 책'으로부터 요컨대 비이성적인 것으로부터 배워야만 하는 것일까?

니체에게서의 이성 비판에 대한 물음은 이성이 계몽의 중심 개념으로서 유럽 근대의 자기 이해의 근간을 이루는 사항인 만큼, 그의 근대 비판의 귀추를 결정하는 물음으로서 지금까지 수없이 문제 되어 왔다. 그 과정에서 니체는 이성과 정신에 대해 삶과 영혼의 근원성을 이야기하는 자로서, 계몽의 흐름을 흡수하는 서구 문명에 대한 독일 문화의 투쟁을 대표하는 자로 만들어진 일도 있다면 제국주의 시대에서의 부르주아 문화의 퇴폐를 보여주는 비합리주의라는 이미지를 보급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미묘한 아이러니로 채색되고 자주 의도적으로 상반되는 해석 가능성이 짜 넣어진 그의 텍스트에는 이성의 우군인가 적인가와 같은 단순한 결정 방식에 저항하는 점이 있다. 니체에게서 특징적인 것은 오히려 이성과 비이성, 계몽과 반계몽의 관련을 묻고 그 대립의 기원을 찾는 시선이며, 또한 그의 이성 비판은 때때로 '계몽의 변증법' 자연지배를 지향한 이성의 발전 끝에 초래된 신화로의 회귀와 새로운 야만으로부터의 탈출구를 찾는 사고에 접근하는 점도 있다. 이에 관해서는 이성에서 도착된 '힘에의 의지'밖에 보지 못하는 니체는 '이성의 타자'에 호소함으로써 계몽과 변증법과 결별했다고 하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비합리주의라는 이미지나 계몽의 변증법과의 결별이라는 비판은 모두 이성이라는 말에 사로잡힌 나머지 니체가 그 이외의 말에 의해 표현한 근대에 대한 태도를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니체의 이성 비판의 지평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가 사용한 또 하나의 비유로 눈을 돌려야만 할 것이다. 즉, 처음에 인용한 시구에서 그가 호소하고 있던 '자유정신'이라는 비유로 말이다.

 

자유정신

자유정신이라는 표현이 니체의 저작에서 나타나는 것은 1878년 출판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부터다. 당시 니체는 정신생활에서도 실생활에서도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다. 바이로이트에서의 바그너에 기획에 환멸을 느낀 그는 이전의 이상을 다시 묻고, 독일 문화에 대해 지니고 있던 개혁자적인 얽매임에서 벗어나 다양한 사물에 대해 제멋대로의 사유를 차례로 펼치게 되었다. 1879년에 바젤대학을 퇴직한 그의 이탈리아와 남프랑스 그리고 스위스를 오고가는 방랑 생활에 들어간다. 그렇지만 고독한 방황은 상당히 견디기 힘들었던 듯한데, 그의 후년의 유고에서 '나의 존재의 안티노미는 내가 래디컬한 철학자로서 래디컬하게 필요로 하는 일체의 것(직업, 여자, 어린아이, 친구, 사회, 조국, 고향, 신앙으로부터의 자유, 거의 사랑이나 미움과도 관계를 지니지 않는 자유)을 다행히도 내가 살아 있는 존재이지 단순한 추상화 장치가 아닌 까닭에, 그것이 없다고 역시 부자유하다고 느끼는 데 놓여 있다."라고 약한 소리를 토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 막히는 속박으로부터의 탈출 소망은 그의 생애를 통해 변하지 않았다. 다른 유고에는 "달아나자, 친구여, 지루한 것으로부터,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로부터, 뒤뚱뒤뚱 걷는 거위로부터, 너무 딱딱한 여자로부터, 사물을 쓰고 '책'을 '낳는' 노처녀들로부터, 지루해 하고 있기에는 인생이 너무나도 짧지 않은가?"라는 구절이 있다. 이와 같은 스스로 추구한 "자유롭고 제멋대로이며 경쾌한 고독" 속에서 필요할 때에 재잘거린다든지 웃는다든지 하는 무리, "은둔자의 그림자 연극"으로서 그가 날조한 것이 '자유정신'이었다.

 

프라이가이스트(Freigeist)

[인간적] 제1부에 덧붙여진 서문에서 니체는 "그와 같은 자유정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한 적도 없지만, 이미 도래하고 있다고 하여 스스로의 체험을 되돌아보면서 자유정신의 탄생과 변모 과정을 그리고 있다. '위대한 해방'은 갑자기 지진처럼 다가와 영혼을 흔들어 놓는다. 청춘기에 외경과 숭배와 감사의 대상이었던 것(니체의 경우에는 고전문헌학, 쇼펜하우어, 바그너 일 것이다.)에 묶여 있던 자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에 내몰리며, 지금까지 숭배하고 사랑해 왔던 것에 회의의 시선을 던지고 자신이 믿고 있던 가치를 의심하며, 시험 삼아 반전시켜 보게 된다. 이러한 병적인 회의의 고독으로부터 위대한 건강에 이르는 쾌유과정에서 자유정신은 성숙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유정신은 단순한 '프라이가이스트'가 아니게 되고, '지극히 자유로운 정신'으로서 '선악의 저편'에 서게 된다.

프라이가이스트라는 표현을 니체는 많은 경우에 이성의 이름으로 종교를 비판하는 고전적인 유형의 자유사상가를 가리켜 사용했다. '속박된 정신'이 신항에 응고외어 있는 데 반해, '자유정신'과 '프라이가이스트'는 어느 것이든 인습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신앙이 아니라 근거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나 종교와 전통을 비판하더라도 하나의 신념을 고집한다든지 이성 신항 하에 멈춰 서버리는 프라이가이스트는 아직 자유정신이라고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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