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의
'좌익의'라는 것에서, 이른바 정통파, 즉 소비에트마르크스주의에 가깝다는 점에서, 게다가 그 내용에 있어서도 영향력이 큰 니체론인 한에서, 루카치의 대저 [이성의 파괴]에서의 니체를 둘러싼 한 장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은 히틀러의 출현에 이르는 근대 독일의 사상사, 특히 그 '비합리주의'의 역사를 바로 파시즘에 의한 파국을 초래한 역사로서 이성, 반이성의 도식 하에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셀링, 키르케고르, 쇼펜하우어로부터 니체, 삶의 철학을 거쳐 인종 이론에 이르는 비합리주의 전통을 고발하고 단죄하고 총괄하는 그 격렬함과 도식성과 당파성 때문에 이 책은 때때로 악서의 대명사가 되기도 하며, 혹은 구동독에서는 철학사와 문학사 기술의 틀에 박힌 양식을 제공하는 것이 되기도 했다. 일련의 사회주의 정권의 해체라는 역사적 현실을 그 도식과 분별력 전체를 냉정하게 생각해 보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니체론이지만, 이것은 지금까지 일본에서의 니체 수용의 지배적 추세인 인생론적, 실존주의적 니체를 고려하면, 그것에 대한 파괴력을 지닌 대항축을 이룬다. 여기서 루카치는 니체를 반동적 부르주아 내지 제국주의의 지도적 철학자로 자리매김하며, 그 주요한 적은 운동 및 세계관으로서의 사회주의였다 고 단죄하고, 그것을 텍스트에 따라서 상세하게 논의해 간다. 물론 니체가 정책으로서의 제국주의를 선취하여 찬미한다든가 사회주의에 간섭하여 비판했다는 것이 아닌 바, 그 점에서 그는 무지에 가까웠을 것이다.
오히려 정신의 심층에서 그러한 것과 공명하는 것을 발군의 재능과 감성을 가지고서 표현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루카치는 간접적 변호론이라는 개념을 고안해내고 있지만 이것은 사상가가 우연하게도 시대의 핵심부에 놓여 있는 심성을 체현한다고 하는 의미에서 직접적인 것보다 훨씬 더 커다란 영향력을 지닐 수 있다고 생각된다. 루카치는 1848년을 경계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하강기에 들어서며, 거기서 독특한 데카 당한 성격을 지닌 사상적 세계가 생겨났다고 보아, 니체야말로 이 데카당스를 인식하고서 그 잘못된 극복을 기도한 대표자라고 간주한다. 니체의 과잉 혁명적 제스처는 현 상황에 대한 반역임과 동시에 제국주의적 사상 내용을 선취한다고 하는 이중성을 지니며, 세련된 문화 비판과 아만의 긍정의 공존도 이로부터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요컨대 세련은 지배 계급을 향한 것이며, 야만은 억압받는 계급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노예를 원하면서 노예를 주인으로 교육한다면 바보가 아닐 수 없다"라는 [우상의 황혼]의 [노동 문제]를 다루는 단편의 말을 붙들고서 루카치는, 니체가 경제적 기초를 무시하고서 오로지 이데올로기 수준에서만 문제를 보고 있으며, 더욱이 그 해결을 주인의 대응 여하에서 찾고 있다(히틀러의 선구)고 힐난한다. 새로운 유형의 훈육이야말로 니체의 불변적 사회적 이상이었던 것이며, 그리하여 이 이상을 방해하는 사회주의자에게로 그의 증오가 향한다.
니체가 왜 반그리스도자로서 등장하는가 하는 것도 이러한 시각에서 파악될 수 있다. 즉 그리스도교로부터 프랑스혁명'이 발생하는 것이며, 이로부터 민주주의가 그리고 사회주의가 발생한다. 따라서 그 반그리스도교는 실은 사회주의의 근절을 바라는 것이었다 는 것이다. 영원회귀 사상도 우선은 그리스도교적인 피안 신앙을 향해 있지만, 모든 초월을 격렬하게 공격 함으로써 사회주의의 혁명적 미래 전망의 도덕적 지반을 무너뜨리게 된다고 한다. 영원회귀의 사상이 역사의 발전은 원리적으로 아무것도 새로운 것을 산출하지 못한다는 명제의 신화화이기도 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자유주의의
현대 자유주의는 평등의 이념 및 '복지에 대한 권리'를 기초로 하여 정치영역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발휘하게 하고, 경제 영역에서는 정부에 의한 시장에의 개입, 재분배를 추구한다고 하는 이중의 특징을 지니는바, 니체가 비판한 19세기의 고전적 자유주의로부터는 크게 변용되어 있다. 이러한 복지국가 형 자유주의에 이론적인 뒷밤침을 주고자 한 것이 미국의 윤리학자 존 롤즈의 [정의론]이다.
칸트주의를 표방하는 그의 선(바람직함)보다도 공정함을 우선적인 주제로 생각하고, 다양한 선의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를 탐구하는 까닭에, '의무론적 자유주의'라는 진영에 포함될 수 있다. 역으로 롤즈에 따르면 선을 공정함과는 독립적으로 정의하고, 그것을 최대화하는 제도가 정의에 부합한다고 간주하는 '목적론'은 현대 사회의 정의를 구상하는 데서의 적격함을 결여한다. 목적론의 일종으로 니체와 아리스토텔레스를 그 대표 격으로 하는 '탁월 주의'가 있는데 거기서 "예술, 과학, 문화에서의 인간의 탁월을 최대한으로 달성할 수 있도록 제도를 결정하고, 개인의 의무와 부담을 정해야 한다"는 탁월성 원리를 창도한 니체가 공격의 대상이 된다. "인류는 끊임없이 위대한 개인을 낳도록 노력해 야만 한다. 가장 희귀하고 가장 소중한 표본의 이익을 위해 살 때에만 최고의 가치, 가장 심오한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쓴 그가 "소크라테스와 괴테와 같은 위인의 인생에 부여하고 있는 절대적인 무게는 이상하다"라고 롤즈는 단정한다. 의무론적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탁월이라는 선의 최대화로만 인생의 목적을 축소시킨 니체의 입장은 너무나도 편협하며, 다양한 선의 구상을 지니는 개인들로 이루어지는 사회 정의의 기초를 제공할 수 없다. 다만 롤즈의 목적론 비판은 영어권에서 지배적이었던 공리주의를 주된 표적으로 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니체를 본격적으로 검토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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