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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학 공부

반유대주의와 이데올로기

by 아이화 2023.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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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대주의

서구 나라들의 유대인을 둘러싼 상황이 변화하는 것은 18세기말, 특히 프랑스혁명의 발발 후의 일이었다. 1776년의 미합중국 독립선언에서의 유대인에 대한 시민권 부여, 1789년의 프랑스에서의 유대인 해방령 등에서 보이는 시민 혁명 하에서의 유대인의 평등한 시민으로서의 인지는 유대인의 서구 사회로의 이러한 동화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발흥하고 있던 자본주의 경제 하에서의 서구 사회 전체의 격렬한 계층 분화와 재편에 의해,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동구로부터의 방대한 유대인의 유입에 의해 촉발되어 서구 사회에서의 새로운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의 상황이 산출되어 간다. 

 

반유대주의의 기원

유대주의의 발생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우선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반유대주의가 명확한 정치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획득하는 것은 1871년의 독일 제국 건국 이후의 시기라는 점이다. 이것은 독일 제국 전국이 서구에서의 국민국가 체제의 완성을 상징하고 있다는 점과 관련된다. 예를 들면 한나 아렌은 반유대주의가 이 독일 제국 건국에 의해 거의 완성을 본 근대 유럽의 정치적 질서의 기본적 틀인 바의 국민국가 체제에 대한 광범위 한 공격의 일부라고 말하고 있다. 국민국가의 틀을 지방하고 있었던 것이 민주주의에 기초하는 정당 시스템과 근대 관료제이자 거기서의 계층들과 계급들 사이의 모순과 알력의 조정이었을 때, 유대인은 이러한 국민국가의 틀이 가져다준 이익의 가장 큰 수혜자라 고하는 편견을 받기 쉬웠다. 왜냐하면 바로 국민국가의 틀에서 비로소 유대인은 서구 사회에서의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금융과 관료 실무 등의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국민국가의 기능적 담당자로 되어 갔기 때문이다. 이것은 국민국가 내부에서의 계층들, 계급들 사이의 대립·항쟁의 과정에서 국민국가의 틀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또는 적어도 거기에 스스로를 동일화할 수 없다고 느끼는 계층에 의한 희생양으로서의 유대인에 대한 공격을 국민국가의 틀 그 자체에 대한 공격과 중첩되는 형태로 유발했다.

이것은 아렌트에 따르면 또 하나의 측면을 지닌다. 그것은 유대인의 서구 사회로의 동화의 한계라는 문제다. 19세기 후반의 서구 유대인 사회 안에서는 그리스도교로의 개종과 서구 사회로의 동화의 진행과 오히려 배반하는 형태로 유대적 정세성의 재확인, 재확립에의 지향이라고 해야 할 움직임이 출현한다. 

 

 

반유대주의와 이데올로기

이러한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의 대표적인 예로서 고비노, 바그너, 오 이겐 뒤를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고비노는 프랑스 인이지만, 그 인종 이론은 오히려 독일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한다. 1854년에 출판된 [인종불평등 론]에서 고비노는 각각의 인종의 특성과 그에 기초하는 위계질서를 확정하고, 이러한 특성과 위계질서에는 더 나아가 문명의 위계질서가 대응한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위계질서의 정점에서는 것이 게르만(아리아) 인종과 문명(문화)이며, 그 대국에서는 가장 열등한 인종이 유대인이었다. 이러한 고비노의 인종 이론은 독일의 모든 반유대주의의 이론적 근거가 된다. 바그너는 [음악에 서의 유대성]이라는 1850년의 논문에서 왜 유대인을 앞에 두게 되면 '억누르기 어려운 불쾌감'을 느끼는 것인지를 밝히고자 한다.
바그너를 유대인에 대한 증오로 몰아세우고 있는 것은 유대인과 자본주의적 근대를 이중 사본으로 만드는 속임수다. 이에 의해 바그너는 유대인을 저열한 배금 주의자로 지어내고, 그들이 창조하는 예술은 그러한 배금주의에 오염된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유대인이 얼마나 본래적인 의미의 창조성으로부터 거리가 먼 존재인지를 그들의 몸짓과 말의 모양까지 제시하여 증명하고자 한다. 바그너의 반유대 주의에서는 48년 혁명에서 좌절된 반자본주의 감정이 왜곡된 형태로 분출한 반유대주의의 전형적인 예를 볼 수 있다. 덧붙이자면, 바그너는 1881년 및 82년에 '바이로이트'에서 고비노를 직접 만난다. 또한 바이로이트에서 발행된 바그너 파의 기관지 [바이로이트 블 래터]는 매호 노골적인 반유대주의 선전 기사를 게재하고 있었다. 뒤링의 경우는 바그너의 경우 이상으로 착종되어 있다. 왜냐하면 뒤링은 유물론적 실증주의의 입장에 서는 유력한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링은 한편으로 1881년에 저술한 [인종, 풍속, 문화 문제로서의 유대인 문제]에서 사회의 모든 영역에 침투하는 유대인 지배를 격렬하게 비난하고, '기생 인종' 유대인이야말로 사회 모순의 근원이라고 지명한다. 뒤링의 유대인 비난은 인종론적 수준을 넘어서서 레싱과 실러, 나아가서는 니체에까지 미친다. 그들도 또한 유대인으로서 지탄되는 것이다. 이러한 착란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뒤링의 반유대주의에서는 눈앞에 존재하는 사회적 모순과 갈등을 가상적의 실체화와 그것에 대한 정서적 대응에 의해 보상하고자 하는, 독일의 근대 비판 이데올로기에 공통된 사고 방법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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