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가 말하는 '고귀함'이란 무엇일까?
[선악의 저편]의 마지막(제9장)에는 '고귀함이란 무엇인가?'라는 표제가 붙어 있으며, 그중에서도 287번은 '고귀함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시작되고 있다. 또한 유고에서도 마찬가지 제목이 붙어 있는 단상이 몇 개 보인다. 그러나 그것들 가운데 어느 것에 서도 고귀함이라는 개념의 명확한 규정이 이루어져 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우리는 갑작스럽게 맞닥뜨리는 고귀함'이라는 말의 다양한 용법들의 전체로부터 그 의미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귀한'(vomehm)은 일반적으로 가치가 높은 인간에게 붙여지는 형용사이며, 굳이 말하자면 '됨됨이가 좋은'으로 치환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 유형의 니체식의 이분법인 주인과 노예, 지배자와 피지배자, 강자와 약자, 건강한 자와 병든 자' 등등의 대립에서 는 각각의 전자만을 표시한다. 그러면 고귀한 인간, 됨됨이가 좋은 인간이란 좀 더 상세하게 말하면 어떠한 자인가? '고귀함'은 '귀족적'과 거의 구별 없이 사용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반드시 출생이나 혈통이 아니다. 니체는 어떤 국면에서는 확실히 출생이나 혈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예를 들면 그가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가장 고귀한 인간으로서 평가한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섬 의 소지주 집안 태생이다. 앞에서 말한 [선악의 저편] 287번은 고귀함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여기서 결정을 하고, 여기서 서열"을 확정하는 것은, 오랜 종교적 관용어를 새로운 한층 더 깊은 의미에서 다시 받아들여 말하자면, 그것은 업적이 아니라 믿음이다. 그것은 고귀한 영혼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어떤 근본적인 확신이며, 구할 수도 없고 찾을 수도 없으며 아마 잃어버릴 수도 없을 것인 그 무엇이다. 고귀한 영혼은 자기 자신에 대한 외경의 염을 지닌다" 즉 스스로 갖추어지는 자기 확신과 자기 외경이 고귀함의 요건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 같은 책 265번은 그와 같은 고귀한 인간이 타자를 대할 때의 행동 원리에 대해 그것은 이기주의라고 말한다.
"내가 말하는 이기주의란 '우리가 그것이다'와 같은 존재에게는 다른 존재가 그 본성상 종속되고 희생되어야만 한다는 저 확고한 신념이다" 나아가 272번에서는 타자에 대한 특권의 행사를 자기의 의무 속에 헤아려 넣는 것이야말로 '고귀함의 표시'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타자들에게도 물론 다양한 서열이 있다. "여러 사정이 처음에는 그를 망설이게 만들지만, 이 영혼은 자기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사람이 있음을 인정한다. 이 서열 문제를 명백히 한 후, 그는 자기 자신과 관계할 때 갖는 것과 같은 확실한 수치심과 섬세한 존경심 속에서, 이들 동등한 인간이나 동등 한 권리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움직이게 된다. 그는 이러한 사람들과 스스로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 주는 권리 속에서 스스로를 존경하는 것이다"
고귀한 인간의 행동 원리로써의 이기주의는 "의무를 짊어져야만 하는 것은 자기와 동등한 자에 대해서뿐이며, 서열이 낮은 존재나 모든 이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뜻대로 '마음이 바라는 대로', 어찌 됐든 '선악의 저편에서' 행동해도 상관이 없다는 원칙"으로 정리될 수 있다. 요컨대 고귀한 인간은 자기 자신이 바라는 바를 '선'으로서 거리끼지 않는 자주적 권력의 주체이며, 그런 의미에서 다음에 제시되듯이 도덕적 가치의 창조자이기도 하다.
"고귀 한 부류의 인간은 스스로를 가치를 결정하는 자라고 느낀다. 그에게는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 그는 '나에게 해로운 것은 그 자체로 해로운 것이다'라고 판단한다. 그는 자신의 입장에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존중한다. 이러한 도덕은 자기 예찬이다. 그 전경에는 충만한 감정과 넘쳐흐르고자 하는 힘의 느낌, 고도로 긴장된 행복과 베풀어주고 싶어 하는 부유함의 의식이 있다. 고귀한 인간 역시 불행 한 사람을 돕지만, 그러나 거의 동정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넘치는 힘이 낳은 충동에서 돕는다."
따라서 니체 식 가치 평가의 키워드인 '힘의 과잉'이나 '삶의 충실'이 결국 고귀함의 근원인 것이다. 고귀한 인간은 자발적, 적극적, 능동적으로 살아간다. 타인의 시선이나 평판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 까닭에 거짓말을 하지도, 허영심이나 르상티망에 내몰리지도 않는다. 다만 마지막으로 덧붙여만 하는 것은 니체가 말하는 고귀한 인간에게는 대단히 잔학하고 냉혹한 측면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도덕의 계보, 제1논문 11절에 따르면 역사상 고귀한 종족은 동료들끼리는 배려와 자제와 신의와 우정을 서로 보이지만, 일단 밖의 세계로 나오면 그 야성적 투쟁 본능을 마음껏 발휘하며, 살인•방화•능욕•고문 등 만행의 끝을 보았다. 침략의 족적이 미친 모든 지역에 야만인이라는 개념을 남긴 것은 다름 아닌 이 고귀한 종족이라는 것이다. 니체는 이 야성적 투쟁 본능을 '금발의 야수'라는 말로 긍정적으로 표현했으며, 나시츠가 니체 텍스트의 이 부분을 특히 좋아하며 이용한 것은 일찍이 알려진 바이다.
철학에서 바라본 '고통' 이란?
니체에게 있어 고통이란 단지 기피•방지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죄책과 고통이야말로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고통 속에는 쾌락 속에 있는 것과 동일할 뿐인 예지가 놓여있다. 고통도 쾌락과 마찬가지로 종족을 보존하고자 하는 최고급의 힘의 하나다"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커다란 고통이야말로 정신의 궁극의 해방자인 것이다. 커다란 고통이야말로 우리 철학자로 하여금 그 최후의 깊이에까지 억지로 내려하게끔 하는 것이다","고통 없이는 인류의 지도자나 교육자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고통도 육체적 고통도 대부분 경험할 수 없고, 고뇌하는 자의 모습을 목격할 기회도 적어진 현대인은 "예전 사람들보다 고통을 훨씬 더 미워하게 되었고, 그 어느 때보다도 그것을 더 나쁘다고 말하게" 되고 말았다. 더 나아가 '금욕주의적 이상'은 괴로워하는 자의 관심을 괴로움으로부터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모종의 '기계적 활동'을 사람들에게 주입하고, 그 최면 작용으로 그들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마비시켜 왔다. 따라서 "고통은 신성하고"라는 고대 그리스의 비교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 "일체의 생성과 성장, 일체의 미래를 보증하는 것이 고통의 전제가 된다"는 것을 확고히 이해해야만 한다.
니체에 의한 이러한 고통의 파악은 타자와의 분리가 초래하는 고통이 재합일의 전제라고 생각한 헤겔과 통하는 측면을 지니고 있으며, 니체를 의식하면서 "고통을 괴로워하는 것이 그 격렬함을 완화시킨다."라고 이야기한 작품이 있다. 또한 억제를 상실한 안락에의 예속, 고통의 회피가 회사나 조직에 대한 과잉 충성, 국가에 대한 의존 감각의 만연을 가져왔다고 하는 후지타 쇼조의 진단을, 니체의 시대 비판의 연장선상에서 읽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전문학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시대적 고찰 (0) | 2023.03.04 |
---|---|
반니체 - 좌익의, 자유주의의 (0) | 2023.03.03 |
무신론화, 무에의 의지, 무질 (0) | 2023.03.03 |
다윈주의와 단눈치오 (0) | 2023.03.03 |
니힐리즘, 허무주의에 대해 말하다 (0) | 2023.03.03 |
댓글